공부

우리나라 근대문학 작가들의 이야기를 해도 되나? 2

나비girl 2016. 6. 3. 16:47

http://oeker.net/bbs/board.php?bo_table=garden&wr_id=1148123


작가들 이야기를 하면 문학사 이야기를 빼 놓고 할 수 없는데 너무 자세하게 나가면 많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한 부분도 많아
그리고 내가 막 휘갈기다 보니 오류가 있는 것 같아서 조금씩 수정할겡!

전편 댓글에서 이광수와 김동인의 관계를 매우 잘 지적해 줬어! 살리에르와 모차르트 같다는 말 ㅋㅋ 김동인은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제제제제일 잘 나가 하는데 당대 최고 문인으로 칭송받던 이광수를 보고 질투심에 눈이 멀었지..
사실 문학 교육에서 다룰 때 무정은 빼 놓지 않고 다루는데, 이건 사실 그 시기에 나오지 않았다면 이만큼 주목을 받을 일도 없었어. 그에 반에 김동인은 기법적 새로움을 추구한다든가 독자적인 표현관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하는 면에서 이광수보다는 좀 더 문학의 본질에 다가간 사람이므로 이광수 보다는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냔은..ㅋㅋㅋ 혹시 여기 이광수의 후손들 없지....?

김유정과 박록주의 사랑에 대해서는 냔들도 많이 알고 있구나! 아니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구낭!
댓글에도 언급해 줬듯이 김유정은 춘천 대지주의 아들이라 우쭈쭈하면서 컸어요
근데 박록주가 그런 고귀하신 자신의 마음을 안 받아주니까 빡친 것도 맞아요
그리고 형이 재산 다 말아먹어서 막판에는 김유정이 폐결핵 고칠 돈도 없었습니다..
혹시 내 글에 오해가 있는지.. 이상이 동반자살하자고 하니까 김유정은 거절했어! 살고 싶다고.. 이 부분 댓글로 피드백한 것 같은데.. 그래서 친구인 안회남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번역할 거리 있으면 좀 달라고.. 그 돈으로 닭 사서 닭 고아 먹을 거라고 한 거야 ㅋㅋ
그리고 내가 실레마을이라고 쓴 건, 고향에 내려와서도 그녀를 잊지 못한 김유정을 이야기하고자 그런 거야 ㅋㅋ
실레마을에서 박록주를 만나서 사랑한 게 아니라 서울에선가 어디에선가 보고서 잊지 못해 계속 구애를 했다는 것!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을 발간한 정병욱 선생이 6.25 전쟁에 끌려간 게 아니라 일제 말 학도병으로 징집된 거 맞아
잘못 적었어 미안! 그리고 윤동주가 생애 가장 존경한 시인은 정지용이 맞음요! 정지용 시인이 윤동주가 죽고 난 후 신문에 유작을 처음으로 발표했어!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시비도 정지용 시인의 시비 옆에 건립되었고!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사인은 소금물 주입에 따른 것 맞아! 일제 후레자식들이 윤동주 선생에 소금물을 주입했다고 해
앗차! 나냔의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혹시 아니면 어쩌나 했는데 여러 냔들의 제보에 따르면, 일본에서 윤동주 선생 추모제하는 거 맞네! 확실해 졌어 ㅋㅋ

고은에 대해서 아는 거 있냐고 물어보신 베일양? 들으면 기절할 거예요 고은은 이쪽 업계에서 소문이 매우 안좋아효
그 썰은 이문열, 황석영과 함께 풀겠어효

덧붙이면 박목월은.. 우리에게 '가정'이라는 시로 유명하지? 그렇지만 가장 가정적이지 못한 분이시라능.. 바람피고 애인이랑 제주도에 도피갔는데 부인이 찾아와서..............여기까지만 얘기할게 다음편에서 풀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몇몇 댓글에서 냔들이 얘기해 줬듯 다들 한 얼굴해.. 그리고 있는 집 자식에다 재능까지 있으니 얼마나 거만하겠어. 모던뽀이 모던뽀이 이지랄하면서 여성 관계 복잡했던 문인들 정말 많다요........나열할 수 없을 지경.. 그건 군데군데 찝어서 얘기할게!

아 우리나라 문학이나 문학사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면 언제든지 물어봐 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다 설명해 줄게! 책이나 강의 소개해 달라는 냔들도 많았는데, 그건 이 시리즈를 마감할 때 한꺼번에 추천할게! 그리고 혹시라도 문학사에 대해 간략히 알고 싶은 냔이 있다면 얘기해 주라! 한 번 정리할 의향이 있다요...

이번편은 최대한 자세하게, 그리고 오류없이 쓸게! 휘갈기듯 쓰다 보니까 군데군데 오류가 있더라궁..그리고 재밌는 일화 중심으로 쓰다보니 작가의 배경(부자라든지 부자라든지 부자라든지..)이나 당시의 상황(우리가 누구? 모던뽀이! 라든지..)이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는 최대한 덧붙여서 쓸게!
그리고 댓글에서 냔들이 다 지적해 준 부분 고쳤어! 외정냔들 다들 천재냐눙? 냔들의 피드백 덕분에 좀 더 완벽한 글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고마워!!!!


4. 이상
부제: 그는 왜 찻집을 여는 족족 말아 먹는가(feat.구본웅, 박태원)

이상은 유년시절이 참 힘들었던 사람이야. 친부모를 떠나서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한테 입양돼서 자랐거든. 생부든 큰아버지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고 혼란에 빠진 이상은 거울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빛을 반사시키며 놀았대. 아마 이때부터 자기분열적인 증상이 있지 않았나 다들 추측해. 그렇지만 집은 매우 부유했다는 점..배울만큼 다 배웠다는 점.. 기억하고 가실게요~~
(하지만 후에 이상의 본가와 백부네 모두 가세가 기울어서 이상이 학교에서 현미빵을 팔아서 공부를 했다고 해..)

이상은 다 알고 있듯이 문학을 전공한 게 아니라 건축학을 전공했어. 자 우리가 지금까지 봤던 이상의 수많은 난해한 시들이 왜 그랬나 이해가지? 아라비아 숫자나 기하학 기호 등을 자꾸 써 댔던 것은 다.. 저 망할 건축학때문이야..

이상의 작품을 보면 이상한 숫자 많이 나오지? 12라든지 69다방이라든지 조8이라든지.. 이거 다 성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욕이야.. 일본-조선총독부-을 향해 욕을 하고 싶었던 이상은 저런 식으로 성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욕을 했다능.. 근데 난 이해 못할..

근데 본명이 김해경으로 알고 있는데 왜 李箱이라는 필명을 쓰게 되었느냐? 다양한 썰이 있어

1. 건축 현장에서 일본인들이 이상~이상~하고 불러서 그런 거다
2. 아니다 이상은 고등학교 때부터 그 필명을 썼다
3. 이상의 절친으로 알려져 있는 추상화가 구본웅이 이상에게 화구상자를 선물로 줬는데 그게 오얏나무 상자여서.. 그래서 李箱

등이 있지만 그냥 이상은 이상해...............김해경이 훨씬 이쁘구만..

여기서 이상의 이상한 시 한 편 보고 가자.

시제일호(詩第一號)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되었던 시 '오감도' 중 1편이야..
뭐래는 거니 싶지????????? 와 나 이거 나올 때마다 미치겠어...정말 어쩌라고?????? 응??????? 싶음

근데 네 맘=내 맘b

저거 발표된지 몇 시간도 안돼서 난리남. 뭐 저런 시가 다 있냐며 지면 아끼라고.. 너네는 돈이 썩어나서 저런 시를 싣냐고..조선의 모던한 독자분들 난리나셨다!! 으르렁 으르렁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의 모던뽀이 이태준 선생이 이상에게 믿음을 시전하시지.. 그래서 이 뒤로도 무려 15회를 연재하게 해 주신다능..

자 우리 문학 시간 아니니까 13인의 아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각자 생각해 보자..
우린 범인이잖아.. 아직 이상 연구하는 교수들도 저게 뭐다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셨어..
그러니까 우린 무식한 게 아니라 지극히 정상인 거야.. 저딴 시로 좌절하지 말자!!!

이상의 별명은 흰둥이였어! 얼굴이 너무 하얘서 동네 아낙들이 그렇게 불렀대 ㅋㅋㅋㅋ '흰둥아~ 흰둥아~ 울랄라 울랄라' 뭔가 매칭이 되지?
그래서 곱추인 구본웅 선생과 함께 돌아다닐 땐 사람들이 곡마단 패로 오인했대..그렇지 않으면 사진사...아 눈물 좀 닦고 가실게요
이건 웃음으로 눈물 닦기도 안된다...

자 이제 이상의 다방 창업 스토리를 들어볼까?
이상은 백부가 남긴 재산으로 그 유명한 '제비 다방'을 여셨다! 그리고 온천 여행 중에 만난 술집 여급 출신인 금홍이를 마담으로 앉히지.
그리고 둘은 동거를 시작하는데.................................................... 당시 21세였던 금홍은 이상이 마흔이 넘는 사내로 보였던 거야.
그래서 빡친 이상은 얘기하지
“나는 추호의 틀림없는 만 25세 11개월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다. 그렇건만 나는 노옹(老翁)이다.”라고.

냔들아 홍안미소년이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치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흰둥이가 무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잘생기긴 했어 그지? 그리고 노안이기도 해 그지? ㅋㅋㅋㅋ

암튼 이 제비다방에는 당대 유명한 모던 뽀이들이 출입을 많이 했어. 박태원이나 이태준, 정인택, 김기림 등등
근데 금홍이 이냔이 자꾸 바람을 피네? 그리고 자꾸 때리네? 거기다 다방이 망해가네? 거기다 이상은 금홍이가 다른 남자와 만리장성을 쌓는 걸 도와주려고 박태원네 집에 자꾸 가네? ㅋㅋㅋㅋㅋㅋㅋ p군, 박태원 개짜증났겠지?

여기서 그 유명한 소설 '날개'가 나와. 금홍이와의 동거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이라고 볼 수 있어. 날개 재밌다 냔들아 읽어 봐!
이상은 역시 소설이 제맛이야...........시는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읽지 마...(깎아내리거나 비난하는 거 아니야! 웃자고 하는 소리!!)

암튼 이렇게 제비다방은 문을 연지 2년 만에 문을 닫..........하지만 여기서 굴하지 않죠!!
‘제비’의 문을 닫고 나서도 이상은 인사동에서 ‘카페 쓰루’, 종로 1가에서 다방 ‘69’ (미친 다방 이름 봐라) ‘무기’ ‘맥’ 등을 열지만, 번번이 실패했어. 이때 이 다방을 열 게 도와준 사람이 구본웅이라고 해.
그리고 여급 출신인 권순옥과 사귀는데.. 친구인 정인택이 정순옥을 좋아하는 거야. 많이많이! 그래서 괴로워하던 정인택이 음독자살을 시도하다가 미수에 그치는 일이 발생하지.. 그래서 이상은 권순옥이랑 정인택을 맺어 주어..
와 사랑의 큐피트 납셨다!! 나도 좀 엮어주세여............외롭습니다..

이상은 다방을 여는 족족 다 말아 먹어.. 와 어떻게 저렇게 다 말아먹지? 구본웅이 부자였으니 망정이지...............(먼산)
그래서 그걸 옆에서 다 지켜본 박태원은 자기 소설에 이상을 등장시켜 ㅋㅋㅋㅋ 그리고는 디스하지..
박태원 소설에 나온 소설가나 시인-그것도 다방에 죽치고 있는-이 박태원 자신을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상을 뜻하기도 해

여기서 삼각 관계가 발전하지

구본웅은 이상에게 다방을 차려주지. 하지만 난 누구? 이상이야~ 말아 먹을테야 냠냠 이러고 진짜 다방 경영에 실패해. 그러면 옆에서 그걸 보는 박태원은 좋다고 이상을 비웃는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관계야.. 멋지지? ㅋㅋㅋㅋ

이렇게 이상은 구본웅이라는 화가와 매우 절친했어. 구본웅이라면 미술을 전공한 냔들이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지?
이상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면서 우리나라 추상화가의 대표 주자셔.
이상이 다방 차리게 도와준 사람이기도 하면서, 다방을 다 말아 먹고 난 후 방세도 내지 못해 셋방을 전전하던 이상에게 구본웅이 자신의 아버지 회사인 '창문사'에서 일하게 도와 줘. 와 진짜 이런 친구 어디 없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또 거기서 이상은 구본웅의 이복동생을 만나서 동거를 시작하고.........

아니 이상의 일생은 다방 말아먹기, 여자 만나기만 하면 무슨 절차라도 된 양 동거하기.. 이거밖에 없는 듯..
그렇지만 존경해요...............♡

이상과 매우 절친했던 구본웅은 그에게 그림을 하나 그려 줘


이렇게도 절친했던 둘.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일제에 검거되고, 폐결핵으로 죽고 후에 이상에 대해 여러가지 말들이 많았을 때
구본웅은 이상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해. 친구를 위해 입을 닫은 거지. 박태원의 경우는 곳곳에서 이상의 저급한 생활에 대해 언급한 경우가 많았지만(물론 이게 잘못됐다는 게 아님) 구본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이상에 대해 함구해.
구본웅이라는 친구가 있었기에 이상은 구본웅의 이복동생의 품에서 편히 눈감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와 이상 너무 길다...............빠진 내용은 냔들이 댓글에서 추가해 줘!! 이러다 책 한 권 쓸 기세..


5. 김소월
부제: 여성여성열매는 어디서 그렇게 먹는 건가요? (feat.숙모)

우리에게 시 '진달래꽃', '초혼', '접동새', '먼후일', '산유화' 등으로 유명한 김소월 시인의 본명은 김정식이야.
와 시랑 매치가 안되지? 김정식하면 내가 조선 최고의 정력남이오!! 할 것 같은 사람인데..
하지만 김소월 시인은 20년대 민요시인으로 유명해.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공무도하가', '황조가', '서경별곡' 등을 잇는 이별의 정한을 여성적 정조로 풀어낸 대단한 시인이시지. 7.5조의 민요적 율조를 매우 잘 풀어낸 분이셔.

학교에서 배울 때 항상 김소월과 함께 붙어다니는 분은 한용운 선생이지? 한용운 선생의 이야기는 다음에 풀어내도록 할게. 너무 강직하신 분이라 잘못 썼다가는 무덤 박차고 일어나실 것 같아..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저 불교예요! 불교 신자임!!)

그러나 이러한 시들이 나오게 된 데에는 김소월의 유년시절이 큰 영향을 끼치게 돼.
김소월은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으로 태어나. 그러나 소월의 아버지가 소월이 두 살 나던 해에 음식 선물을 말등에 싣고 처가 나들이에 나섰다가 그걸 빼앗으려던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이라 쓰고 개새끼들이라 읽는다)과 시비가 붙은 거야. 그래서 집단 폭행을 당하시고 말 잔등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오게 돼. 그래서 소월의 아버지는 한 달 가까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가 겨우 깨어나시지만 그 후 정신 이상자가 되어 평생을 폐인으로 지내셔. 아 시발 빡치네!!!!!!!!!!!! 일본 개새끼들!!!!!!!!!!!!!!!!!!!!!!!!!!!!!!!!!!!!!!!!!!!!!!

여기서 딴소리. 냔들아 나 아직 교사 아니야! 현재 고시냔으로서(그런데 지금 공부 안하고 이러고 있을 때니?) 대한민국 국어 교육을 책임질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 여기서 군데군데 욕하더라도 이해 좀................실제로 과외나 애들 가르칠 땐 욕 안해..
그리고 나 40대에 교육감 나갈 거니까 여기 서울 사는 냔들 있으면 나 좀 꼭 찍어 줘 내가 진짜 우리나라 교육 제대로 바꿔볼게!!
뭐래 암튼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것, 방구석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아버지를 보며 자라야 했던 것, 이런 건 소월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던 인생의 큰 계기였어. 어른이 되면서 소월은 비사교적인 성격이 나타나고 폐쇄적인 내향성을 가졌다고 해. 이게 다 저런 이유에서 생긴 게 아닐까 싶어.

그렇지만 이런 소월에게도 그의 내면에 따뜻함을 품게 해 준 사람이 있었어. 바로 숙모 계희영이야. 신학문에 눈을 뜬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언문을 깨우쳐서 고대 소설과 설화들을 탐독했던 계희영은 소월이 네 살되던 해에 공주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

"신부인 나는 큰 머리를 하고 은봉채를 꽂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개구멍 바지를 입고 눈은 샛별같이 반짝이며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새삭시 앞으로 다가 앉으며 '야, 새엄마다.'하고 반색을 했어. 사내아이는 치맛자락 가까이 다가 앉아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다가 옷도 한 번 쓸어보고 종일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어."

라고 숙모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과의 첫 만남을 회고했어. 김소월 시인 정말 귀엽지? 야, 새엄마다. 래 ㅋㅋㅋㅋ 귀여워 상상되지 않아? ㅋㅋㅋㅋㅋ
암튼 김소월의 어머니는 성격이 활달해서 종가 살림살이를 다 떠맏고 계셨어. 근데 자꾸 김소월이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칭얼대니까 그 역할을 숙모인 계희영에게 떠넘기지.

"인제부터는 자네가 우리 갓놈에게 이야기를 실컷 좀 들려주게. 나는 이야기하는 재질도 없고 또 할 말도 없어." 라고 말이지.
냉정하시다 어머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긴 바빠 죽겠는데 저 갓놈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엄마 옛날 이야기 해 주세요!! 하면 짜증나지.. 우리 엄마 같으면 된장을 얼굴에 발라버릴지도 모를..ㅠㅠ

이때부터 소월은 숙모한테 틈만 나면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대. 거기다 혼인한 직후부터 남편이 외지를 떠도는 바람에 소박맞은 숙모는...(눈물이..) 틈만 나면 찰싹 달라붙는 조카에게 심청전도 얘기해 주고 장화홍련전, 춘향전, 옥루몽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 줘. 기억력과 관찰력이 아주 뛰어났다는 김소월은 숙모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 주는 것에 재능을 보이기도 하지.

이렇게 어머니와 숙모에게 들었던 옛날 이야기, 함께 불렀던 민요, 그리고 불구가 된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혐오 등이 김소월이 후에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어조의 시를 쓰게 된 요소가 되는 거야.

숙모가 평안도 박천 진두강 언저리에 살던 오누이가 계모의 학대 때문에 죽은 뒤 접동새가 되었다는 설화를 해 준 적이 있대.
이 설화를 바탕으로 소월은 '접동새'라는 시를 쓰게 돼.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어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夜三更)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이렇게 숙모와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 함께 불렀던 민요 등이 김소월의 시편들에 잘 나타나. 민요적 서정성, 전통적인 한과 슬픔, 설화성 등은 다 여기서 기인한 거라 볼 수 있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폐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서 소월을 교육하시는데, 그 유명한 정주 오산학교에 소월을 보내. 여기서 소월이 바로 그의 스승인 김억을 만나게 된 거야. 근데 3.1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소월은 배재고보에 편입했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데, 1923년 일본 썅놈들이 우리 민족을 학살한 계기가 되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돼. 그리고는 1925년에 시집 진달래꽃을 펴 냈어.

김소월은 상속받은 전답을 팔아서 식구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를 해. 거기서 동아일보 지국을 인계받아서 혼자 신문을 배포하고 수금을 하는 등 경영을 도맡게 되는데.. 소월의 성격 알지? 소심하고, 폐쇄적이고.....그러니 어떻겠어..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된 거야. 그래서 어울리지 않게 생계를 위해 고리 대금업에도 손을 대지만 또 실패했어.

이후부터 김소월은 아예 삶에 대한 애착을 놓아버린 게 아닌가 싶어. 참 마음이 아리지? ㅠㅠ
그래서 술꾼으로 허송 세월을 보내는데 이게 문중의 귀에 들어갔네? 그래서 빡친 문중의 어른들이 소월을 불량자로 낙인찍고 등을 돌려.

하지만 소월은 돌아가신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문중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착한 사람이었어.

1934년, 산자락 여기저기에 널린 무덤 주변을 한남자가 서성 거려. 얼굴에 짙은 어둠이 드리운 남자는 간략한 성묘를 마친 후에 무덤에 뿌리고 남은 술을 천천히 마셨어. 그 무덤가에 앉아 술을 마시는 그의 얼굴은 매우 초췌해 보였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남자는 허청거리며 산길을 내려왔어. 내려오는 길에 장에 들러서 아편도 구했지. 그리고 서둘러 귀가한 그는 아내와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셨어. 그는 아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든 걸 확인하고는 장에서 사온 아편을 삼켰어.

이렇게 1934년 12월 24일 소월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 돼.

김소월의 공식 사인은 자살이야. 슬픔과 한으로 뒤덮인 유년시절을 보낸 그를 위해 잠시 애도의 묵념을..

-초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6. 염상섭
부제: 현진건 나와!! 술 권하는 사회라고? 에라이! 술 취하는 사회다!!! (feat. 염상섭의 술친구들)

염상섭은 김동인과의 관계 속에서 많이들 살펴 봐. 둘 다 대단한 천재이기도 하고 1910년대 말에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지.
서로 장난 아니야. 소설가의 자질이 어떻고 저떻고 지들끼리 싸우는 거야. 그러고는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 20년대에 작품을 막 써 내는데, 서로의 작품에다가 그렇게 토를 단다? 이건 어떻게 저건 어떻고.. 난리도 아니야 ㅋㅋㅋㅋㅋ
이렇듯 염상섭은 비평가로도 유명해. 어찌나 남의 작품을 조목조목 따져대는지..

그렇지만 염상섭은 1920년대까지도 한국 근대소설이 계몽성에서 탈피하지 못한 걸 극복한 작가이기도 해.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발견하고 주체로서의 삶에 대해 역설하는 작품들이 많지.
유명한 작품으로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전(원래 제목은 '묘지' 으아!!!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삼대, 두 파산 등이 있어.
그리고 김동인이 쓴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먼산) 이 일로 둘은 의절했다고 한다..

여기서 김동인의 글을 가지고 와 볼게.

‘이 사람이 소설을 썼다.’ 이러한 마음으로 나는 그 작품을 보았다. 그러나 연재물의 제1회를 볼 때 벌써 필자의 마음에는 큰 불안을 느꼈다. 강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과도기의 청년이 받은 불안과 공포의 번민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나타난 것은 그것이었다. 필자는 상섭의 출현에 몹시 불안을 느끼면서도 이 새로운 하므레트의 출현에 통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

소설가로서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김동인은 염상섭의 출현을 햄릿의 출현이라고 표현해 ㅋㅋ

암튼 염상섭은 일찍부터 문명 개화를 세례를 받은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이고 염상섭은 꽤 넉넉한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어. 염상섭의 작품 세계를 순수 고유어의 보고로 평가 받아.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생을 마친 염상섭은 서울 중산층의 풍속과 의식에 정통했어. 그리고 평양 출신인 김동인이 부러워했을 정도로 토박이 서울 말씨(학계 용어로 경아리 말씨)와 풍부한 어휘를 소설의 밑천으로 삼은 거지.

이쯤으로 하고.. 염상섭에 관한 에피소드를 풀어내면 술에 관한 이야기가 제일 많아 ㅋㅋㅋ 그리고 그의 여성 편력도..
항간에는 그가 여성편력이 심하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정성이었다. 라는 말도 많아. 사실은 그의 아내가 남성 편력이 장난 아니었다는 사실이..............

암튼 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염상섭은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 호주가로 알려져 있었대. 염상섭의 호가 뭔지 알아?
바로 횡보야. 橫步. 옆으로 걷는다는 뜻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쯤대면 우리 외정냔들 눈치 채셨겠져? ㅋㅋㅋㅋㅋ
술에 취하면 자꾸 갈 지자 모양으로 비틀비틀 옆으로 걷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ㅋㅋㅋㅋㅋ 아싸! 나랑 염상섭이랑 공통점 찾음!!

언젠가 동인지 <<백조>>의 만수를 축하하는 술자리 뒤끝에서 박종화와 현진건이 술을 대포잔으로 60잔, 차상찬과 나도향은 70잔, 염상섭은 무려!!!!!!!!!!!! 100잔을 비우면서 종로 밤거리를 거닐었대. 와 홍대 앞 돋네..ㅋㅋㅋㅋㅋㅋ

또 변영로, 오상순, 이관구 등과 함께 염상섭이 크게 취해서 성균관대학교 뒷산 약수터에서 옷을 홀딱 벗고는 소를 타고 내려와서 그 인근 주민들이 엄훠나!!!!!!!!! 하고 놀란 일도 있대. 진짜 대단한 주당들이지 않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천재나 범인이나 술마시면 개가 되는 건 마찬가지인 듯........

또 집이 없었던 염상섭은 이사를 자주 했는데 집을 옮긴 후에는 외상 선술집을 바로 마련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대. 와 지금 살아 계시면 양주 한 병 대접해 드리고 싶다..진짜..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술을 좋아하는만큼 문학에도 엄청난 열정을 가진 작가지. 집필량이 쩌는 걸로 유명하지? 장편 28편, 단편 130편, 그 외에도 평론과 수필 등.. 아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아.. ㅋㅋㅋ 염상섭 연구자들은 오호라 자료가 풍년이로구나!! 하고 좋아하면서 한편으론 짜증도 날 거야.. 너무 많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소설에서 등장 인물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서 동네 문패를 하나씩 살피고 그 이름의 항렬까지 따져 볼 정도로 꼼꼼한 성격이었대.

이런 염상섭이 해방 이후에는 사정이 점점 더 안좋아져서 끝내는 상으로 받은 시계와 반지를 팔아야 할 정도였대. 거기다 편찮으시기까지 했으니.. 결국 직장암인가? 그걸로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음

염상섭은 글을 쓸 때 꼭 옆에 아내가 있어야만 안심하고 글을 썼대. 그 이유는 위에서 밝혔지만 아내가...........남성 편력이 장난 아니라서 혹시라도 옆에 없으면 누구랑 또 바람을 피진 않을까 싶었겠지? ㅋㅋㅋㅋ

그래서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남겨..

"내 아내 절대로 재혼 못하게 해!!!!!!!!!!!!!!!!!!!!!!!!!" (그의 아내 그때 52세..)

여기까지가 염상섭에 관한 이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