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우리나라 근대문학 작가들의 이야기를 해도 되나? 4

나비girl 2016. 6. 3.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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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왔는데 처음부터 딱딱한 문학사 이야기를 풀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냔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뒷 이야기를 가지고 왔어!

그럼 지금부터 시작!!!!!

근데 원래 시대별로 하려고 했는데 뭔가 뒤죽박죽..................이해해 줘....

9. 김동리
부제: 어둡고 쓸쓸한 유년 시절

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거목으로 칭송 받는 작가야 .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소설에 그대로 담아냈다고 볼 수 있지.

김동리의 본명은 시종이고, 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어. 당시 김동리의 어머니가 마흔 두 살로 노산한 탓에 젖이 모자라고 밭일도 바쁘고 그래서 김동리는 형수의 품 속에서 키워져. 형수에게 암죽을 받아먹으며 자랐는데, 김동리는 어머니의 품도 그립고 암죽도 제대로 받아 먹지 못 했어. 그러던 김동리는 두 살 때부터 아버지가 남긴 술찌끼를 빨아먹기 시작해 ㅋㅋㅋㅋ
술찌끼를 빨아 먹는 버릇은 점점 심해져서 세 살 무렵에는 취한 나머지 비틀거리다 뒤뜰에 굴러 떨어지곤 했다고 해 ㅋㅋㅋㅋㅋ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구경오고 막 그랬다네? ㅋㅋㅋㅋ

김동리가 이렇게 술을 먹게 된 건 배고팠던 것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매우 커.
동리의 아버지는 주정뱅이여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행패에 못 이겨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 그래서 동리는 그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에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어.
아버지가 술에 젖어 주사가 부리면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 이웃의 지동댁네로 피신을 했다고 해. 지동댁네 쪽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면 아버지는 "귀신 달아난다!" 고 고함을 치고, 지동댁은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읍시다!"하며 더욱 소리를 높이곤 했다고 해.
이러한 경험은 김동리의 작품 <무녀도>에 매우 잘 드러나 있어. 이러한 유년 시절의 체험을 작품에 반영했다고 볼 수 있지.

이렇게 아버지의 지나친 음주와 이에 따른 어머니의 불화로 빚어진 가정 분위기가 동리를 더욱 외롭게 만든 탓도 있지만, 당시에 동리가 살고 있던 동네에 예기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매해 사람이 빠져 죽는 걸 보고 들으며 자랐다고 해.

거기다 유일한 소꿉친구였던 여섯 살짜리 선이와 남순이 누나가 죽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지.
이렇게 김동리는 어릴 때부터 죽음과 삶, 사람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갖게 된 거야. 유년 시절에 받은 죽음에 대한 충격은 곧 그가 작품을 창작하게 되는 동기가 되고, 그러한 인간의 죽음과 운명은 동리 문학의 뿌리가 되는 거지.

아래는 김동리가 직접 쓴 <가랑잎 위에서>라는 글이야.

아버지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음주, 이에 맞서기 위해 시작된 어머니의 기도, 이 음주와 이 기도의 마찰에서 빚어진 누나의 쉼 없는 눈물,이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작은형의 담배질, 이런 것들이 머리를 스쳐가도 그것은 잠깐 동안뿐이요, 내년 이른 봄에 치러야 할 중학 입시 따위는 거의 머릿속에도 없는 듯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오직 선이의 죽음, 남순 누나의 죽음, 모든 사람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만을 생각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이렇게 가랑잎 더미 위에 누워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슬픔이 아니라 즐거움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것은 죽음이 차츰 슬프거나 두려운 것이아니고 즐겁고 그리운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리하여 나는 차츰 죽음에 친숙해진 듯했고, 그것을 원하는 것이라고까지느끼기 시작했다. 생각은 버릇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렇게 버릇이 들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 자신이 죽음을 원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김동리의 대표 작품으로는 <역마>, <무녀도>, <등신불>, <화랑의 후예> 등이 있어. 꼭 읽어보길 바라!


10. 서정주
부제: 서정주와 다츠시로 시즈오

국문학계에 큰 고민을 안겨주고 가신 바로 그 분. 살아있는 시신(시의 신이라는 뜻)이라고까지 불리며 한국 현대 시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당 서정주. 하지만 그는 권력 바라기라고 까지 불리며 권력에 기생하며 참 가여운 삶을 사신 분이지. 한때는 욕도 참 많이 했지만 이제는 가엽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리고 여전히 싫어. 근데 싫지만 그의 시는 좋다.........ㅎ ㅏ...

미당 선생이 쓴 시는 정말이지 아릅답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어.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를 못 참아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인가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이 파격적인 산문시에서 느껴지는 서정적 아름다움이 느껴지니? 고등학교 때 처음 이 시를 접하고는 정말 충격 먹었어. 그 뒤로 서정주 시는 닥치는대로 다 읽었는데..............알고 보니 정말 권력 바라기여서 썅욕을 하면서 책을 버렸다는 슬픈 전설이.......☆

아무튼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시는 분의 삶은 말그대로 개판이야. (격한 표현이 불편한 냔들이 있다면 미안해. 어디까지나 내 개인 감정이니까 살짝 눈 감아 주길 바랄게)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일명 질마재 마을로 불리는 곳. 나지막한 산들이 삼면을 에워싸고 그 한 봉우리에 선운사가 있어 봄이면 청보리가 들판을 채우고, 온 산을 뒤덮은 붉은 동백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곳.
서정주는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태어나, 유달리 많이 전해오는 옛날 이야기의 세례 속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

할아버지가 노름빚으로 재산을 다 잃고 난 후 아버지가 이곳에 와 가계를 꾸렸는데, 당시 이 마을의 큰 부자였던 인촌 김성수( 그 분 맞음.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고려대학교 창립자)의 마름 노릇이며 관리인 일을 하며 제법 재산을 모으기도 했어.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 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후략)


그런데 아버지가 집안을 일으키고자 김성수네 집에서 마름 노릇이며 관리인 일을 한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따지고 보면 당대에 서정주 큼 성공한 사람도 드물텐데, 수 집안의 종이 아닌 마름 일을 했다는 부친을 종으로 격하시키면서까지 쓴 자전적인 이 시를 보고 있자니, 당시에 서정주가 얼마나 욕망이 강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돼. 결국 서정주 때문에 아버지가 관리인 노릇을 그만두셨대.
아니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무슨 일을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 허 참 정말.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가 없네 그려.

아무튼 그러던 와중 일제 말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강화해 우리말 사용과 잡지 발간을 금지하고, 창씨 개명을 실시하게 됐지.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터나 군수업체로 징용, 징병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처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기까지 하는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는 시대가 왔어.
이러한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서정주는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하고, 친일시를 썼지.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구국대원
구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바로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시야. 이거 말고도 많아. 그냥 개소리 왈왈임. 대일본제국이 우리 조선인들을 특별히 고르셔서 전쟁에 데려 가려고 하시는데 왜 안 나가려 하냐며, 태평양 전쟁은 성스러운 전쟁이니까 무조건 가야 한다며 시도 써서 갖다 바치고 연설도 하고 아주 그냥 자기의 시대가 온 거지.

혹시 항상 즐겁기만 한 냔이라서 좀 빡침을 느껴 보고 싶으면 찾아 봐. 딥빡침을 느낄 수 있을 거야 ㅋㅋㅋㅋㅋ

<친일 관련 작품>

1942.7.13-17 '시의 이야기' (매일신보)
1943.10 '징병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춘추 어머니에게'
1943.9.1-10 '인보의 정신' (매일신보)
1943.10 '스무살된 벗에게' (조광)
1943.10 '항공일에(시)' (국민문학)
1943.11 '최체부의 군속지원(소설)' (조광)
1943.11.16 '헌시(시)' (매일신보)
1943.11 '경성사단 대연습 종군기' (춘추)
1943.12 '보도행' (조광)
1944.8 '무제(시)' (국민문학)
1944.12.9 '송정오장송가(시)' (매일신보)


서정주의 변심에 사람들이 수근대고 손가락질 하며 욕하니까 시간이 흐른 후에 이렇게 말하지.

일본이 망해도 백 년은 갈 줄 알았다. 일본의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시를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래요 누구는 살기 위해 창씨개명하고 친일 행위하는데 누구는 독립 운동하다 돌아가시고 말이지. 다 살기 위해서인데 뭐 안 그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한 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부일파(附日派)'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어 사는 걸로 이익을 노리자면 끈적끈적 잘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다붙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와 얼굴에 철판을 까셨나. 대단하지? 그니까 말인 즉슨, 자기는 친일도 부일도 아닌 종천순일(從天順日)-하늘을 뜻을 따라 일본에 순응한 것 뿐이다-을 뿐이라는 거야. 너무나 떳떳하고 당당한 변명이지 않니? 사람이 이렇게 on my way여야 성공하나 봐.. 보고 배워야지.. 그래야 나 또 불합격 안 하지.. ㅠㅠ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뭐야 뭐야!!!!!! 부끄러웠대매?????????? 가도가도 부끄럽대매?????뭐야 윤동주 선생 따라하는 거야?????????? 그냥 한번 내뱉어본 말이야? 정말 말 한번 잘 썼어. 말그대로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온 거야. 그게 다야. 결국은 반성을 안 한거지.
그러니까 반성을 안 하고 권려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권력 바라기를 한 거지.

일제 때는 천황을 칭송하더니 해방이 되면서는 재빨리 친미로 돌아서 이승만의 전기를 쓰는 놀라운 처세술을 발휘했어. 그래서 교육부의 관료도 하고 좋다 좋아. 꺼삐딴 리가 아니라 꺼삐딴 서네 ㅋㅋㅋㅋㅋ
그리고는 역대 독재자를 칭송하는데 늘 앞장서면서 권력의 똥개 노릇을 마다하지 않던 그렇고 그런 잡놈이었을 뿐이야.
그래서 박정희 정권 때는 베트남 파병을 선동하는 시를 쓰지.

1945년 8월 15일
일본인의 종 노릇에서 풀리어 나던 때
흘린 눈물 질척거리던 예순 살짜리들은
인제는 거의 다 귀신 되어
어느 골목에서도 보이지 않고
그날 미소 양군 환영의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역으로 몰려가던 이, 삼, 사십대
인제는 거의 늙어
낡은 파나마를 머리에 얹고
파고다 공원에서 환갑을 맞이하고

그날 어머니의 젖부리에 매어달려
해방이 무엇인 줄도 모르던 애기들
인제 자라서
무직과 프래카드와 파고다 공원과 귀신 노릇을 배우고

탈색과 표백은 아직도 덜 되었는가?
백의동포여

평양 같은 언저리
납치되어 산채로 빨랫줄에 말리어지는
기화하는 수만 미이라의 소리 듣는다
이 표백과 탈색은 언제쯤 끝나는가?

새로 나갈 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베트남뿐이다
베트남뿐이다


자 이게 다가 아니야.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히 죽여버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시까지 쓰지. 생신 축하드린다며 쓴 시가 이래. 전두환을 '단군 이래 5천 년 만에 만나는 위인으로 칭송하며 헌시를 보냈어.

,b>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할 말이 없다..........나는............................................근데 쓰다보니 서정주의 친일 행적 고발편 이런 느낌이 드네....................그래도 봐 줄 거지?
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 서정주를 미당 선생이 아니라 말당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해. 이 아이러니함은 바로 그가 시까지 써다 바쳤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께서 직접 '말당'이라고 칭하셨다지? 한자를 모르셔서......한 끗 차이로 말당....근데 어쩜 이리 잘 어울릴까 ㅋㅋㅋㅋㅋㅋ

암튼 또 다른 일화를 하나 가져와 볼게. 우리에게 태백산맥의 작가로 유명한 조정래가 쓴 산문 가운데 미당 서정주와 얽힌 사연이 하나 나와. 문학지의 주간으로 있던 조정래는 광복 40주년 기념 특집으로 친일 문인 문제를 다루기로 했어. 친일 문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죄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문학지에서 인터뷰를 함으로써 사죄를 하게 하자는 것이 그 특집의 큰 방향이었어. 그니까 생존해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지면을 제공해 주기로 한 거지.
이렇게 좋은 기회를 서정주는 그냥 발로 차 버렸다!!!!!!!!!

서정주는 대학 시절 조정래의 선생님이었고, 그의 아내를 시인으로 등단시킨 스승이었으며, 그들 결혼식의 주례였다.
조정래는 아내와 상의 끝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서정주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선생님께서 글의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선생님은 자유로워지십니다." 조정래가 조심조심 꺼낸 말이었다.
"뭐라고! 넌 대학생 때부터 반골기질이 승하더니만…. 그래 들어봐라."
안색이 변한 서정주는 두 시간이 넘도록 장광설을 폈다. 그러나 결국 서정주는 글쓰기를 거부했다. 서정주는 끝내 자신의 친일행각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은 것이다.
죽음을 얼마 앞두고 어느 텔레비젼 방송국 기자가 마이크를 대며 물었다. 친일에 대해 말해 달라고. "거 뭐 잘들 봐달라고 해!" 초췌한 서정주의 대꾸였다.
조정래는 그 화면을 보면서 가슴이 쓰라렸다. 그의 선생님은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미당은 그야말로 미당인 채로 이 세상을 떠났다.


제자가 찾아가서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결국은 자기 변호만 하다가 끝끝내 사과를 거부했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거 뭐 잘들 봐달라고 해!"라니................

서정주 같은 권력의 똥개가 친일행각을 벌이고 있을 때, 이육사 선생은 열 차례도 넘게 투옥당한 끝에 세상을 떠났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려던 윤동주 선생도 일본감옥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었어.

왜 누구는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친일 행각을 했고, 또 누구는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독립 운동을 했을까?

서정주는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그게 하고 싶어서 였던 것 같아.
그래서 서정주의 시가 한국 서정시의 백미로 꼽힐 만큼 대단한 작가였어도 여전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권력에 아첨하고 빌 붙어서 우리 현대 문학사에서 문인으로서 최고의 권력과 영화를 누렸으니 말이야.

서정주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여기서 마무리할게